1차 세계대전을 한마디로 언급할 때 흔히 처절한 참호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르됭 전투는 1916년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이 전투는 300일 이상 지속되어 역사상 가장 긴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전쟁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가장 잔인하고 무의미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힙니다.
배경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8월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랑스, 러시아, 영국이 한 편이 되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은 곧 교착상태에 빠졌고, 양측은 참호를 파고 긴 싸움을 벌였습니다.
1916년, 독일 최고사령부는 교착 상태를 깨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했습니다. 독일군은 베르됭을 점령하면 프랑스군이 베르됭을 방어하기 위해 자원과 병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되어 서부 전선에서의 전반적인 입지가 약화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전투 시작
베르됭에 대한 독일군의 공세는 1916년 2월 21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에리히 폰 팔켄하인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군은 프랑스 전선에 대규모 포격을 가한 후 보병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포격은 멀리 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강렬했고 프랑스 방어선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습니다.
필립 페탱 장군의 지휘 아래 있던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거센 공격에 방심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처음에 밀려났고 독일군은 상당한 이득을 얻었습니다. 독일군은 베르됭을 둘러싼 여러 중요한 요새와 언덕을 점령했고, 도시 자체와도 근접한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도시를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페탱은 "저들은 절대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진지를 사수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프랑스군은 놀라운 용기와 결단력으로 싸웠고, 결국 독일군의 도시 점령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전투 격화
그 후 몇 달 동안 전투는 계속 격렬해졌습니다. 독일군은 몇 차례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프랑스군의 전선을 뚫을 수는 없었습니다. 반면 프랑스는 몇 차례 반격을 가하며 독일군을 서서히 밀어냈습니다.
이 전투는 곧 1차 세계대전 중 가장 잔인하고 치명적인 전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전투는 대검과 수류탄을 사용해 적을 죽이는 백병전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참호는 진흙과 물, 시체로 가득 차 있었고 병사들은 극심한 추위와 폭우 등 혹독한 기상 조건을 견뎌야 했습니다.
전투는 병사들의 정신 건강에도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계속되는 포격과 전투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알려진 포탄 충격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전투로 인한 트라우마로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전선에서 철수해야 했습니다.
이 전투는 새로운 무기와 전술의 사용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독일군은 처음으로 화염방사기를 사용했고, 가스 공격을 통해 프랑스군의 전선을 돌파하려 했습니다. 한편 프랑스군은 유명한 75mm 야포를 사용하여 독일군에게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파괴적인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전투가 멈추다
1916년 여름이 되자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은 계속해서 공세를 펼쳤지만 프랑스군의 전선을 뚫을 수는 없었습니다. 반면 프랑스는 계속해서 진지를 지키며 반격에 나섰습니다.
솜 전투
1916년 7월, 영국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솜 전투는 독일군의 전선을 무너뜨리고 베르됭에서 프랑스군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합동 공세였습니다.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의 지휘 아래 영국군은 독일군의 방어를 약화시키고 영국 보병의 공격을 위한 길을 열기 위해 독일 전선에 대규모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포격은 영국군이 기대했던 것만큼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은 포탄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깊은 지하 벙커와 땅굴을 건설했습니다. 영국 보병이 공격을 시작하자 독일군의 기관총 사격에 맞닥뜨려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솜 전투 첫날인 1916년 7월 1일은 영국군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날 중 하나였습니다. 영국군은 사망자 19,000명을 포함해 57,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습니다. 독일군 전선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프랑스군도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많은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1916년 여름과 가을 내내 계속 공세를 펼쳤습니다. 전투는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잔인하고 치열한 전투가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베르됭 전투
베르됭 전투는 솜 전투와 함께 1916년 여름과 가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페탱 장군의 지휘 아래 프랑스군은 계속해서 진지를 지키며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감행했습니다.
1916년 10월, 프랑스는 독일군이 연초에 점령한 베르됭을 둘러싼 요새와 언덕을 탈환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습니다. 프랑스는 잃어버린 땅의 대부분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프랑스는 1916년 가을 내내 계속 공세를 펼쳤지만 독일군의 전선을 뚫고 베르됭을 탈환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마침내 1916년 12월 18일, 독일군이 공세를 중단하고 이 지역에서 철수하면서 전투는 끝이 났습니다.
여파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는 양측에서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대가를 치른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는 1차 세계대전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르됭 전투는 프랑스가 독일군의 도시 점령을 막고 진지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중요한 승리였습니다. 이 전투는 독일군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독일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다른 전선으로 자원을 전환해야 했기 때문이죠.
반면 솜 전투는 영국군에게 막대한 대가를 치른 실패작이었습니다. 영국군은 전투 첫날에만 6만 명을 포함해 전투 기간 동안 4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 전투는 독일군의 전선을 무너뜨린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영국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자원을 더욱 고갈시키는 데 성공했을 뿐입니다.
솜 전투와 베르됭 전투는 모두 1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전투는 참호전의 높은 비용과 공격 전술의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이 전투는 전쟁 후반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탱크와 가스전 등 새로운 기술과 전술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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