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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여행

[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

by 툴루저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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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nding of Anzac, April 25, 1915, by Charles Dixon

 

 

갈리폴리 작전은 오스만 제국의 갈리폴리 반도(현 터키)에서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 군사 작전입니다. 이 작전은 1915년 4월 25일부터 1916년 1월 9일까지 8개월 동안 진행되었으며, 러시아로 향하는 해로를 개척하고 오스만 제국을 전쟁에서 몰아내기 위한 연합군의 주요 시도였습니다. 이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10만 명 이상의 군인이 사망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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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배경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을 맺은 중앙 강대국 중 하나였습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포함한 연합국은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고 러시아로 향하는 항로를 열려고 했지만, 독일이 통제하는 흑해의 항구로 인해 항로가 차단되었습니다. 에게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좁은 해협인 다르다넬레 해협을 공격하는 아이디어는 1906년 초에 영국에 의해 고려되었지만, 1914년 전쟁이 발발한 후에야 이 아이디어가 재검토되었습니다.

초기 계획은 영국 함대가 다르다넬레스 해협에 진입해 해협을 지키는 요새를 폭격하는 순전히 해군 공격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향하는 길이 열리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스만은 다르다넬 해협을 요새화했고 해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함 여러 척을 포함한 영국 함대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결국 갈리폴리 반도 끝에 상륙한 군대가 내륙으로 이동하여 요새를 점령하고 해군의 길을 확보하는 지상 침공이 결정되었습니다. 이 임무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맡겨졌으며 영국군이 병력의 대부분을 제공했습니다.

침공

1915년 4월 25일, 갈리폴리 반도 끝에 있는 여섯 개의 해변에 상륙하면서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상륙 작전은 높은 지대의 이점을 가진 오스만 방어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지형은 가파른 절벽과 깊은 협곡으로 험준하고 탐색하기 어려웠습니다.

초기 상륙 작전은 대체로 성공적이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해변에 전진 기지를 구축할 수 있었지만 내륙으로의 진격은 더디고 어려웠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을 감행할 수 있었고 연합군은 해변과 언덕에 고립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전투는 잔인하고 종종 백병전이 벌어졌으며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 후 몇 주 동안 연합군은 내륙으로 진격하려 했지만 진척이 더디고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지형은 험난했고, 오스만은 언덕과 계곡을 빠르고 조용히 이동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양측 모두 사상자가 속출했습니다.

양측 모두 큰 이득을 얻지 못한 채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연합군은 여러 전선에 분산되어 방어해야 했고, 오스만 제국의 저격수와 포병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오스만은 진지를 강화하고 반격에 나섰고 연합군의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갈리폴리에서의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연합군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둔군은 갈리폴리에 상륙한 최초의 부대 중 하나였으며, 초기 목표는 ANZAC 코브 상륙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인 사리 베어(Sari Bair) 고지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호주군은 높은 지대와 확고한 진지를 확보한 오스만 수비대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가파른 절벽과 깊은 협곡이 있는 험준하고 탐색하기 어려운 지형이었기 때문에 호주군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호주군은 능선에 발판을 마련하고 오스만 제국의 반격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병사들은 불굴의 의지로 압도적인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투는 잔인하고 종종 백병전이 벌어졌으며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 후 몇 달 동안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연합군은 갈리폴리 전투에서 가장 치열하고 혹독한 전투를 치렀습니다. 극심한 더위와 물 부족, 질병 발생 등 가혹한 환경에 직면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저격수와 포병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았고, 캠페인이 계속될수록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갈리폴리 전투를 설명한 다른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안작의 전설

갈리폴리 작전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갈리폴리에서의 호주 뉴질랜드를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호주와 뉴질랜드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호주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용기와 결단력, 전우애(군인들 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나타내는 용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ANZAC 부대가 보여준 용맹함, 희생, 전투 수행 방식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ANZAC 전설이 형성되었습니다. 호주 뉴질랜드를 전쟁에 맞서 싸운 평범한 사람들로 인식된 ANZAC의 이야기는 호주와 뉴질랜드의 특성을 상징하는 최고의 자질로 자리 잡았습니다.

가장 유명한 ANZAC 중 한 명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 전선에서 호주군을 지휘한 존 모내쉬 경 중장입니다. 모내쉬는 뛰어난 군사 지도자이자 혁신가였으며 전쟁에 대한 그의 공헌은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안작 전설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당나귀를 탄 남자"로 알려진 존 심슨 일병입니다. 심슨은 당나귀를 이용해 전선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들것에 실어 해변으로 이송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1915년 5월 전투 중 전사했지만 그의 용맹함과 이타심은 안작 정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안작 전설은 군인들 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의미하는 '전우애'라는 개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전우애는 갈리폴리에서 병사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생존을 위해 의지했던 ANZAC 경험의 핵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전우애는 호주와 뉴질랜드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호주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정신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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