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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여행

[1차 세계대전] 사라예보 사건

by 툴루저 202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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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사건을 보여주는 사진

 

사라예보 사건은 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1914년 6월 28일 일어난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의 여러 복잡한 시대적 배경이 겹쳐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트리거가 된 사건으로, 아마 당시를 살았던 사람은 혼란한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끔찍한 사고였지만, 이 사건을 시작으로 전세계를 뒤흔들고 많으 사람이 희생되는 전쟁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늘부터 전쟁사를 살펴보면서, 그때의 시대상을 짚어보면서,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점이 있을지 같이 고민해 본다면 이 작업이 또 다른 작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라예보 사건을 설명한 유튜브 영상 감상하기 

 

소개

 

1914 6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소피 호헨베르크 공작 부인이 암살당한 사건은 세계 역사에서 중추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결국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유럽과 세계의 정치 지형을 재편한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촉매제로 여겨집니다. 이 사건은 수십 년 동안 쌓여온 복잡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으며, 그 결과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배경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은 일련의 갈등과 외교적 책략을 통해 생겨난 동맹 체제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프랑스, 러시아, 영국으로 구성된 트리플 앙텐트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로 구성된 트리플 얼라이언스라는 두 개의 주요 동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동맹은 유럽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한 국가가 지나치게 우세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형성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몇 년 전부터 유럽의 여러 국가 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민족주의, 군국주의가 모두 부상하고 있었고, 각 국가는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다른 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독일은 자국의 힘을 과시하고 유럽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자리 잡기를 열망했습니다. 독일의 지도자 카이저 빌헬름 2세는 독일 민족의 우월성과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의 필요성을 믿었던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한편, 오랫동안 민족적, 종교적 갈등의 온상이었던 남동부 유럽 발칸 반도에서는 다양한 민족주의 단체들이 독립과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1878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작은 독립 국가인 세르비아가 특히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거주 지역에 관계없이 모든 세르비아 국민을 아우르는 더 큰 세르비아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러한 꿈은 깊은 민족주의 의식과 세르비아 국민의 자결권에 대한 신념에 의해 추진되었습니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전에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했습니다. 이 조치는 이 두 지역을 직접 지배하기를 바랐던 세르비아를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세르비아의 지도자들은 이 합병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격적인 팽창주의의 증거로 보고 이 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힘과 영향력을 약화시킬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손

사라예보 암살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하나는 '검은 손'으로 알려진 비밀 단체였습니다. 검은 손은 더 큰 세르비아를 만들기 위해 1911년에 결성된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였습니다. 이 단체의 지도자들은 혁명과 테러 전술에 대한 훈련을 받은 고학력자이자 정교한 남성들이었습니다.

 

검은 손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의 유명한 암살과 테러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검은 손의 조직원들은 깊은 민족주의와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력에서 해방시키려는 열망에 동기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과 테러라고 믿었습니다.

 

 

암살 음모

 

1914년 봄, 검은 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대공은 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죽음은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힘과 영향력에 타격을 가하는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검은 손은 암살을 수행하기 위해 보스니아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들을 모집했습니다. 이들은 다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의지가 있는 자들로 선발되었습니다.

 

 

사건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봄부터 준비된 계획은 여름의 프린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가 사라예보를 방문하는날 일어났습니다. 열차를 타고 도착한 대공 부부는 함께온 일행과 함께 4대의 차를 타고 이동했으며, 최초의 저격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암살단은 차량행렬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대공부부가 탄 차가 지가간 다음에 폭탄이 터져 2번째 시도도 실패하게 됩니다. 암살 시도를 알게된 대공 일해은 속도를 높여 시청사로 이동했으나, 이후 부상자을 입은 사람들을 위문하러 병원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총격을 받아 살해되게 됩니다, 임신중이던 조피도 같이 총을 맞고 살해되게 됩니다. 

 

[KBS 역사저널 그날] 사라예보 사건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마무리

 

사라예보 사건은 여러편의 영화에도 다뤄질 만큼 복잡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암살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으로 방문하기 위해 일정을 변경했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의문이 남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의 우리가 그 당시의 그 모든 복잡한 사정들을 알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이후 더 큰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두고 두고 아쉬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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